'학생이시네요?' - 그 한 마디의 위력
- 06 Dec, 2025
“학생이시네요?” - 그 한 마디의 위력
오늘도 들었다
투자사 미팅 끝나고 나왔다. 30분 피칭, 15분 질의응답. 끝날 때쯤 투자심사역이 물었다. “이영준 대표님, 학생이시네요?” 웃으면서 한 말이었다. 근데 웃을 수가 없었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났다. 그 말투, 그 표정. 악의는 없었다. 그냥 사실 확인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카페 들어와서 노트북 켰다. 아무것도 안 된다. 코드가 안 보인다. 자꾸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첫 번째 들었을 때
6개월 전이었다. 첫 외부 미팅. 액셀러레이터 소개로 잡은 자리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정장 입고 갔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완벽했다. 3일 밤새워 만들었다. 시장 규모, 경쟁사 분석, 비즈니스 모델. 다 준비했다.
15장 넘어가자마자 질문이 들어왔다. “대표님은 학생이신가요?” 그때는 화가 났다. 진짜 화가 났다. 내가 준비한 게 이렇게 많은데, 학생이라는 게 중요한가?
“네, 휴학 중입니다. 하지만…” 하고 변명하기 시작했다. 경력 얘기하고, 프로젝트 얘기하고. 근데 상대방 표정이 안 바뀌었다. 그냥 듣고 있을 뿐이었다.
미팅은 30분 만에 끝났다. “검토해보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결과는 2주 뒤 거절 메일이었다.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미팅이 10번 더 있었다. 8번 들었다. “학생이시네요?” 질문을.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아직 학교 다니세요?” “졸업은 언제 하실 예정이에요?” “학생 신분으로 법인 설립이 가능한가요?” 말은 다르지만 의미는 같다. ‘너 어린데 괜찮아?’
팀원한테 물어봤다. “형, 나 미팅 때 어려 보여?” 걔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표님 베이비페이스잖아요.” 농담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거울 보면서 생각했다. 26살. 어린가? 근데 마크 저커버그는 19살에 창업했다. 배민 김봉진 대표는 20대였다. 나이가 문제는 아니잖아.

정장을 입기 시작했다
3개월 전부터 전략을 바꿨다. 후드티 벗고 정장 입었다. 네이비 수트, 흰색 셔츠. 구두도 샀다. 29만원짜리.
미팅 전날 옷 다려놓는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왁스 바른다. 거울 보면서 연습한다. “안녕하세요, 저희 서비스는…”
효과가 있었다. 질문 빈도가 줄었다. 10번 중 8번에서 5번으로. 근데 질문이 바뀌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이건 더 대답하기 어렵다. 학생이냐는 예스 노로 답하면 된다. 근데 나이는? “26살입니다”라고 하면 “아, 그러시구나” 하는 표정이 나온다. 그 표정 알아. ‘어리네’ 하는 거.
정장 입은 내가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학교 MT 때 선배들이 정장 입고 술게임 하던 거 생각난다. 코스프레 같다는 생각. 근데 안 입으면 더 안 된다.
”경험이 중요하죠”
요즘 내 대답법이다. 나이 질문 나오면 이렇게 받는다.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팀은…”
그리고 빠르게 화제를 돌린다. 팀 소개, 프로젝트 히스토리, 지표. 숫자로 말한다. MAU 2만, 재방문율 45%, MOM 12%.
가끔 먹힌다.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군요.” 그럼 20분은 더 버틸 수 있다.
근데 가끔은 안 먹힌다. “경험이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창업이 처음이시죠?” 칼같이 들어온다. 할 말이 없다.
“네, 첫 창업입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희 팀원 중에 2년 차 개발자가…” 또 변명이 시작된다.

팀원들 앞에서는
“형, 오늘 미팅 어땠어요?” 저녁에 치맥하면서 막내가 물었다. “괜찮았어. 반응 좋았어.” 거짓말이었다.
팀원들한테는 말 못 한다. 내가 학생이라서 투자 안 받는다는 얘기. 걔들도 다 20대다. 나보다 어린 애도 있다. 그럼 걔들은 뭐가 되는 거야.
미팅에서 들은 말 그대로 전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투자자가 대표님 나이 물어봤대요?” 그럼 팀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안 되겠다 싶은 공기.
그래서 편집한다.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어. 다음 주에 2차 미팅 잡혔어.” 희망 고문인 줄 알면서도 계속한다. 월급 100만원 받는 애들한테 현실 말해줄 수가 없다.
밤에 혼자 있을 때 생각한다. 내가 대표 자격이 있나. 나이 때문에 팀을 망치는 건 아닐까. 좀 더 나이 많은 사람을 대표로 세우면 어떨까.
부모님 전화
“아들, 요즘 어떻게 지내냐?” 엄마 전화였다. 한 달 만이다. “잘 지내요.” “밥은 먹고 다니고?” “네.”
“그래, 그나저나 복학은 언제 할 거냐?” 이 질문도 패턴이다. 매번 나온다. “엄마, 아직 회사 일이…” “학교는 나와야지.”
아빠가 전화 바꿔 받는다. “이영준, 아빠다. 요즘 투자 받았다며?” “네, 얼마 전에…” “그래, 얼마 받았어?” “5000만원이요.”
침묵이 흐른다. “그게… 많은 거냐?” “네, 시작하기엔 괜찮은 금액이에요.” “그래.” 아빠 목소리가 작아진다. “학교 친구들은 다 취업했다며?”
할 말이 없다. “네, 대부분…” “너도 졸업하고 대기업 들어가면 4~5천은 받을 텐데.” 연봉 얘기다. 매번 나온다.
“아빠, 저 지금 하는 게…” “알아, 알아. 네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근데 백업 플랜은 있어야지.” 백업 플랜. 실패를 전제로 한 질문이다.
전화 끊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부모님한테도 나는 학생이다. 창업가가 아니라.
SNS에 올리는 것들
인스타그램 켰다. 스토리에 올릴 사진 찾는다. 오늘 찍은 미팅 장소 사진. “Good meeting today” 문구 넣는다. 이모지 하나. 💼
피드에는 팀 회의 사진 올린다. “Late night session with the team 🚀” 다들 웃고 있는 사진. 실제론 런웨이 얘기하다가 분위기 안 좋아졌지만.
조회수 확인한다. 120명. 좋아요 35개. 댓글 3개. “화이팅!”, “멋있다 형”, “성공하자”. 고마운 말들이다. 근데 공허하다.
동기 인스타 구경한다. 삼성 입사 소식. 800명이 좋아요 눌렀다. “축하해!” 댓글이 50개 넘는다. 부러운가? 아니다. 근데 흔들린다.
다른 동기는 현대차 합격. “꿈을 이뤘습니다” 글에 정장 입은 사진. 세련됐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다. 휴학 안 했으면.
창업 인플루언서 피드 본다. “26살에 시리즈A 100억 유치” 기사. 나랑 동갑이다. 근데 100억. 나는 5000만원.
스마트폰 끈다. 다시 켠다. 또 본다. 새벽 3시까지.
어제 있었던 일
다른 창업가 만났다. 32살. 2년 선배다. 카페에서 조언 구하려고 만났다.
“저도 나이 문제로 고민 많았어요.” 그가 말했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20대 후반이 제일 애매해요.”
“어떤 면에서요?” 물었다. “너무 어려서 신뢰 못 받고, 그렇다고 경력 쌓기엔 시간이 없고.”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30 넘으니까 좀 나아지더라고요. 근데 그때까지 버티는 게 힘들죠.”
30까지 4년이다. 4년을 버텨야 한다는 말인가. 런웨이는 4개월밖에 안 남았는데.
“조언 하나 해드릴게요.” 그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나이 문제 계속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쓸수록 더 어려 보여요.”
“근데 계속 질문받는데요.” “그래도요. 자신감이 중요해요. 학생이냐고 물으면 ‘네, 학생이에요. 그래서요?’ 이렇게 받아쳐야 해요.”
쉽게 말한다. 근데 그게 안 된다. 나는 매번 변명부터 한다. 그게 문제인 걸 알면서도.
진짜 문제는
집에 와서 생각했다. 진짜 문제가 뭘까. 나이? 경험? 아니면 내 태도?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불안하다. 26살에 4명 먹여 살려야 한다. 5000만원으로 4개월 버텨야 한다. 그 뒤는 모른다.
투자자들이 나이 물어보는 거, 이해한다. 그들 입장에서 나는 리스크다. 검증 안 된 20대.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나이지만, 그들 돈은 안 돌아온다.
“학생이시네요?”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뭘까. ‘당신을 믿을 수 있나요?’ 일 거다. 나이를 묻는 게 아니라 신뢰를 묻는 거다.
그럼 답은 하나다. 신뢰를 증명해야 한다. 말로가 아니라 결과로. MAU 2만을 10만으로 만들어야 한다. 수익을 만들어야 한다.
근데 그게 4개월 안에 가능할까. 모르겠다. 솔직히 모르겠다.
내일 미팅
내일 또 미팅이 있다. 시리즈A 투자사. 기대는 안 한다. 근데 가야 한다.
정장 다려놨다. 구두 닦았다. 헤어왁스도 샀다. 2만원짜리.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어제 다시 만들었다. 40페이지.
“학생이시네요?” 질문 나올 것 같다. 10번 중 5번 나온다고 했으니까. 확률 50%.
이번엔 어떻게 대답할까. “네, 학생입니다. 하지만 저희 지표를 보시면…” 이것도 변명이다. “네, 휴학 중입니다. 그래서 온전히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아니다.
“네, 학생입니다.” 짧게 끊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간다. 그게 나을까. 모르겠다.
새벽 4시다. 못 자겠다. 노트북 켜서 코드 본다. 컴포넌트 하나 수정한다. 푸시 알림 로직. 작은 거라도 고쳐야 마음이 편하다.
창밖이 밝아온다. 아침이다. 또 하루가 시작된다.
“학생이시네요?” 이 질문에 완벽한 답은 없다. 아직은. 근데 계속 찾아야 한다. 4개월 안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