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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
- 02 Dec, 2025
투자자 미팅 때 정장 입는 이유 - 26살이 50대처럼 보여야 하나
26살, 정장 입고 거울을 본다 오후 2시. 미팅 1시간 전이다. 샤워하고 옷장을 열었다. 검은색 정장 바지, 흰 셔츠, 네이비 넥타이. 이 조합은 이제 패턴이 됐다. 투자자 미팅이 있으면 자동으로 손이 간다. 거울 앞에 섰다. 이상하다. 내가 맞나? 26살인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넥타이를 매면 목이 답답했다. 평소처럼 후드티 입으면 안 될까? 답은 알고 있다. 안 된다. 작년 겨울, 첫 번째 투자자 미팅에서 떨어졌다. 피드백은 명확했다. "학생이시네요?" 투자자는 웃으면서 말했는데, 그 웃음이 멍이 들 정도로 아팠다. 내가 한 일이 뭔데. 2년을 코딩했는데. 5000만원 투자받은 게 뭔데. 다 학생 같다고? 그 이후부터 옷에 신경을 썼다. 정장을 샀다. 가죽 구두도 샀다. 헤어도 자주 잘랐다. 모두 같은 이유로. 나이를 속이기 위해. 거울에서 자신을 못 알아봤다. 셔츠 소매가 팔목을 졸라맸다. 넥타이가 얼굴을 작게 만들었다. 혼자 생각했다.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되나? 아니면 해로운 거 아닌가? 투자 유치라는 게 결국 신뢰인데, 나를 감춘 채로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넥타이의 무게 투자자들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계속 맴돈다. 내가 만든 서비스는 틱톡 세대를 위한 거다. 숏폼 비디오 편집 툴. 우리 타겟은 20대다. MZ 세대다. 근데 그 고객들을 사겠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할 때는 나 자신을 거짓말하고 있다. 이게 아이러니다. 미팅에서 만난 투자자들 대부분 50대다. 한두 명은 60대다. 그들은 "젊은 세대의 관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경험 많은 CEO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순이다. 하지만 난 그 모순을 입으로 해결한다. 정장으로. 정장을 입으면 확실히 말을 더 듣는다. 세 번 미팅 했는데 정장 입었을 때가 다 성공했다. 피칭 자료는 똑같다. 말도 같다. 다른 건 옷뿐이다. 그게 정말 다인 걸까? 팀원들은 내가 정장 입고 나갈 때마다 "대표 좀 멋있네"라고 한다. 농담으로. 근데 그 뒤에 "근데 어색한데?"라고 덧붙인다. 맞다. 어색하다. 내가 내 몸 안의 오래된 버전을 걷고 다니는 느낌이다. 어제 미팅에서 투자자가 물었다. "CEO분은 어디서 일하셨어요?" 나이를 짐작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난 빠르게 말했다. "지금 이 회사가 처음이고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배우는 중입니다." 말을 끝내고 생각했다. 이 정장이 없었으면 이 질문 자체가 더 많이 나왔을 걸.딱 한 번만 안 입은 날 우리 투자자들 중에 한 명은 30대다. 한국 유명 창업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랑 첫 미팅은 카페에서 했다. 정장 안 입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깜빡했다. 시간이 없었다. 가다가 연락 받고 바로 갔다. 흑 후드티, 검은 청바지, 스니커. 전형적인 개발자 스타일이었다. 미팅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그 투자자는 내가 한 말을 진짜 듣는 거 같았다. 중간에 끼어들었다. 맞아, 그 생각 좋은데? 하면서. 끝나고 30분을 더 얘기했다. 투자 조건도 다른 투자자보다 낫게 왔다. 나중에 이유를 물어봤다. "그때 당신이 편해 보였어. 거짓말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게 좋았어." 그 말을 들으니 현타가 왔다. 그동안 내가 정장으로 뭐를 했단 말인가. 신뢰를 얻었나? 아니다. 의심만 샀다. 상대가 속으로 생각했을 거다. 저 애는 왜 자기 나이를 감추려고 할까? 뭔가 숨기려는 건 아닐까? 그 후로 미팅 날씨가 바뀌었다. 정장 입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조금 벗어났다. 어제도 반팔 셔츠에 슬랙 바지로 갔다.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이 내 나이가 아니라 사업에 집중됐다. 근데 여전히 불안하다. 중요한 미팅이면 자동으로 정장을 입으려는 손이 움직인다. 습관처럼. 트라우마처럼.나이는 언제쯤 무기가 될까 26살이라는 게 정말 약점일까? 아니면 그냥 나의 자신감 부족이 약점인 걸까? 생각해보니 우리 고객들은 25살이다. 내 또래다. 그들한테 내가 26살이라는 건 강점이다. 그들을 이해하니까. 그 다음 세대를 예측하니까. 근데 투자자 앞에서는 약점이 된다. 경험 부족으로 읽히니까. 말이 안 되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현재 세대를 공략하는 스타트업한테 창업자의 나이는 큰 의미가 없어야 한다. 오히려 나이가 적을수록 목표 고객에 가깝다는 뜻이다. 근데 투자자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나이 많은 CEO = 신뢰도 높음. 이 등식이 깨질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우리 팀원들은 다 20대다. 한 명은 아직 학생이다. 개발은 정말 잘한다. 근데 투자 때문에 자기한테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보인다. 내 트라우마를 팀한테 전해 주고 싶지 않은데, 이미 전해진 것 같다. 어제 회의 때 한 팀원이 물었다. "대표, 우리 너무 어린 거 아닐까?" 아니야. 우리가 하는 게 맞아. 이 서비스를 이만큼 만든 게 우리인데. 왜 자꾸 미안해하지? 근데 그 말을 하면서도 내 머리는 다음 투자 미팅을 생각했다. 정장을 입을지 입지 않을지. 그냥 한번 안 입어보자. 진짜로. 중요한 미팅이든 뭐든. 그리고 떨어지면? 그땐 그때다. 적어도 날 감춘 채로 신뢰를 받은 게 아닐 테니. [IMAGE_4]거울에서 넥타이를 풀었다. 다음 미팅은 이대로 가기로 했다.